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조 공화국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|| [youtube(dlL_5Kr4j5o)] || 1867년, [[대정봉환]]에 이은 [[보신 전쟁]]으로 [[도쿠가와 막부]]가 막을 내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에도 막부 내 [[군인]]들이 일으킨 일종의 [[반란]]이었다. [[도쿠가와 요시노부]]가 [[시즈오카]]로 낙향하는 것을 지켜본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 부총재 [[에노모토 다케아키]]는 구 막부의 신하들을 보호하고 북방을 방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1868년 8월 9일, [[해군]] 기함 카이요마루를 비롯한 8척의 배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했다. 도중에 [[아이즈]] 전쟁에서 패한 전습대를 비롯 [[신선조]]와 창의대의 잔존세력들이 에노모토에게로 합류했고 이를 바탕으로 에노모토는 에조국 마츠마에 번을 침공한다. 당시 마츠마에 번주였던 마츠마에 노리히로가 급사[*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.]하면서 그대로 마츠마에 번 전체를 정복한다. 이를 바탕으로 이들은 [[하코다테]]에 정청을 두게 된다. 이들은 스스로를 에조 공화국이라 칭한 건 아니었지만, [[영국]] 공사관 서기관인 [[애덤스]]가 하코다테 정청을 "공화국"이라 보고하면서 에조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. 하지만 이들이 에조에 정식으로 나라를 세운 건 아니었기 때문에 "에조 도쿠가와 막부 무사대”~~[[삼별초]]~~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긴 하다. 1868년 11월 4일, 에노모토가 하코다테를 점령한 뒤에 영국과 [[프랑스 제2제국|프랑스]]의 공사를 태운 [[군함]]들이 하코다테를 방문했다. 이들은 에노모토와 회견을 가진 뒤,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적은 각서를 보내왔다. "일본 국내 문제에 우리는 중립을 지킨다, 교전 단체로서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, 그러나 '[[미승인국|사실상의 정권]](Authorities '''De Facto''')'으로는 인정한다."라는 것이었다. 이 '사실상의 정권'이란 말은 이후 에조 공화국을 논할 때 두고두고 [[떡밥]]이 되었다. 하지만 '사실상의 정권'이라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했다. 기실 에노모토를 만나고 호감을 가진 영국과 프랑스 군함의 함장들이 본국의 훈령도 무시하고[* 영국의 주일 전권공사였던 파크스는 용어 사용에 신중할 것을 미리 당부했지만 서기관 애덤스가 실수를 저질렀다.] 멋대로 쓴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. 사실상의 정권이란 영국이 신정부만을 유일한 정권으로 인정하기 위한 구실이었다. 그러나 에노모토는 이 '사실상의 정권'이라는 말에서 국제법의 헛점을 찾아내고, 이를 이용하여 하코다테 정권을 교전단체로 인정하게 만든다. 이후 12월 5일, 일본 최초의 [[선거]](입찰)을 통한 정부 조직 구성이 이뤄졌다. 하지만 어디까지나 [[투표권]]은 에노모토를 따라온 군인들에게만 있었고 현지 주민들에겐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. 그래서 사실상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다. 어쨌든 856명이 투표하여 156표를 받은 에노모토가 총재([[대통령]])으로 임명되었고 120표를 받은 마츠다이라 타로가 부총재가, 116표로 아깝게 3등을 한 나가이 나오유키[* 이 인물이 언급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의 직계 고손자가 [[미시마 유키오]] 이기 때문이다.]가 하코다테 지사가 되었다. 그리고 이후 득표순대로 주요 각료들을 선임했다. 하지만 에조 공화국은 기반 자체가 빈약하다 보니 애초에 오래 갈 나라가 절대 아니었다. 당연히 일본 정부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어 즉시 진압군을 보내 공격에 나섰다. 정부군과의 전쟁으로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심지어는 [[매춘부]]들에게까지 [[세금]]을 징수하고 관문을 설치해 통행세를 받으려 들었고, 결국 현지 주민들이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은밀히 정부군을 돕는 일까지 생겨났다. 이런 가운데 1868년 12월 28일, 사실상 이들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군함 카이요마루가 풍랑으로 좌초, 침몰하고 말았다.[* 사실상 에조공화국은 이 배 한 척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신정부측의 어떤 군함보다 이것의 성능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이다. 이 배는 에사시를 점령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좌초했는데 이미 그곳의 정부군은 도망간 후여서, 불필요한 전투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전력을 잃었다는 비판이 컸다. 이 배의 빈 자리는 후일 하코다테 상륙작전에서 크게 느껴지는데, 이것이 없어서 에조 쪽은 신정부측의 상륙을 막지 못했다.] 기다렸다는 듯이 프랑스는 그동안 판매를 유보하고 있던 최신예 군함들을 일본 정부 측에 팔았고, 해군 전력에서 에조 공화국보다 정부 측이 더 우세해지게 되었다. 설상가상으로 서양 각국이 '일본은 오로지 [[천황]]제를 시행하는 [[메이지 유신]] 정부가 정통'이라고 공언해버리면서 에조 공화국은 서양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그야말로 [[사면초가]]에 빠져 버렸다. 결국 정부군에게 밀리던 에조 공화국 측은 1869년 5월 11일, 최후의 결전에서 주력군이 궤멸당하자 5월 17일, 에노모토와 및 각료들이 에조 공화국의 최후 본진인 고료가쿠 성의 문을 열고 정부군에 [[항복]], 5개월여의 파란만장한(?) 역사를 마감하고 [[흑역사]]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. 현재 에조 공화국의 수뇌부가 있던 고료가쿠는 [[하코다테]]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. 에노모토는 반역죄로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1872년 석방된 뒤(에노모토가 직접 번역한 [[국제법]] 책을 받은 [[구로다 기요타카]]가 그가 일본에 필요한 인재라고 여겨 구명 운동에 힘썼다), [[메이지 덴노]] 밑에서 각종 요직을 두루 거치고 [[자작(작위)|자작]] 지위에까지 올랐다. 에노모토 자신에게도 에조 공화국은 흑역사일 듯 싶다(...)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